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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올리버

 

Benedict, baby in Anencephalie

2001년 7월 25일~ 2001년 7월 26일

나의 이야기는 베네딕트가 태어나기 약 5년 전부터 시작한다. 그 당시 임신 18주였던 언니와 형부는 초음파 검진에서 첫째 토마스가 곧 죽을 거란 진단을 받았다.

토마스는 무뇌증을 갖고 있었다. 척추의 상부 말단(두개골)이 닫히지 않은 치명적인 신경관결손증이었다. 우리 모두는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클래어와 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의사들의 낙태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끝까지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를 후회없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렇게 토마스는 임신 37주에 유도분만을 통해 세상에 태어났고 이후 17시간 반을 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아이를 방문하여 직접 품에 안아보았다. 나와 마크 역시 그렇게 했다.

토마스의 출생과 사망 후 2달 채 되지 않아 나는 마크와 결혼했다. 그리고 금새 우리의 첫째가 생겼다. 첫번째 초음파 검사때 나는 몹시 긴장했다. 다행히도 모든 게 정상이었고 우리의 예쁜 딸 세실리아가 건강하게 태어났다. 2년 후에는 세바스챤이 태어났다. 2000년 우리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셋째가 생겼기 때문이다. 분만 예정일은 2001년 7월 17일이었다.

임신 18주, 처음으로 초음파검진을 받는 날인데 웬지 느낌이 안 좋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까지 태동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세바스챤의 경우 임신 12주부터 태동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원래 나는 미리 걱정하는 성격이 아닌데, 그 불편한 기분만은 떨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했던 것 같다.

초음파 검사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침에 정신없이 집을 나선 탓에 그만 초음파 진단서(초음파 검사를 받아도 된다고 산부인과 의사가 증명하는 것)를 깜빡하고 만 것이다. 담당 초음파사는 진단서가 없는 상태에서 검진하기를 주저했다. 나는 그 날 아이를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의사는 고민 후, 검사가 끝나자마자 진단서를 가지고 온다는 조건 하에 초음파검진을 하기로 동의했다.

검사대에 누워 검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무척이나 떨렸다.'아기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고, 어제는 아기의 심장 박동까지 들었으니 별 이상 없겠지?' 검사를 시작한 의사는 가장 먼저 태반이 자궁구에 놓여있는 모습을 보여주였다. 그것은 내가 제왕절개술을 받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초음파사는 그게 반드시 문제되지는 않는다며, 앞으로 자궁이 팽창하는 정도에 따라 태반이 이동할 수도 있다고 있다.

의사는 아기를 본격적으로 검사하더니 매우 조용해졌다. 감격의 기색없이 우리에게 아기의 발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그는 태반과 관련해 말을 많이 했는데 말이다. 몇 분 후 그는 양해를 구하며 남편이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초음파 진단서를 가지고 와야 한다고 했다. '검사 도중 남편을 집으로 보내는 걸 보니, 뭔가 이상이 있는게 틀림없어.'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마크가 돌아오기까지 30분이 넘도록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30분이 30시간처럼 느껴졌다. 의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원장님께도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려고 해요.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 하진 마세요." 당연히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 검사 때 나는 모니터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의사가 아기 얼굴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무슨 일일까?' 나는 생각했다. '혹시 아기한테 코 같은 게 없는걸까?' 그런데 마음 속 깊이 '무뇌증, 무뇌증, 무뇌증...' 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끊임없이 외쳐댔다. 조초하게 마크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영영 멈춘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남편이 도착했고 우리는 담당의사와 원장과 함께 다시 검사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원장에게 태반의 위치를 보여주었고, 원장은 의사가 아까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원장은 직접 검사를 진행하며 잠시 후 말했다. "지금 태아에게... 문제가 있어요. 정확히 설명을 드려야 하니, 저희가 산부인과 전문의 몇 분을 모시고 올게요. 아마도 그게 최선일 것 같아요." 원장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정말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태아' 대신 '아기'라고 말했을 것이다. 불쾌했다. 내 아기가 무슨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동등한 취급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무뇌증인가요?"라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울기만 했다.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대기실로 안내를 받았다. 대기실 안은 제법 싸늘했다. 나는 마크에게 말했다. "치명적인 건 아닐거야. 아마도 심장이나 신장, 폐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해."

우리는 대기실에서 45분 이상을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한 의사가 들어와서 말한다. "죄송합니다. 아기가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어요." 그럼 나는 대답한다. "아, 괜찮아요. 저는 선생님께서 우리 아기가 곧 죽을거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서 나는 핸드백을 챙기고 마크와 함께 병원을 떠나 예정된 발렌타인 기념 점심식사를 하러 것이다.

마침내 산부인과 전문의 한 명이 나타나, 아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들었냐고 물었다. 우리가 못 들었다고 하자 의사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기 머리뼈에 문제가 있어요..."

그 순간 나는 숨을 헐떡였고 두 손에 얼굴을 파 묻었다. 머리 속에 수많은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 품에 안겨 내 손가락을 꼬옥 쥐던 토마스...그의 장례식...땅 속으로 내려가는 토마스의 작은 관...내게 "클래어야 말로 이런 일을 가장 잘 헤쳐낼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했던 어느 한 사람. 이 말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다. 정말 묘하게 들렸었는데.

"무뇌증인가요?" 마크가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무뇌증에 대해 알고 있는지 되물었다. 마크는 토마스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토마스 출산이 언제 유도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클래어와 톰이 한 것처럼 임신을 계속 유지하거나 또는 임신 중절을 하는 것. “아니요, 그럴 순 없어요.” 내가 말했다. 이 순간부터, 우리를 강하게 짖누르던 압력이 사라지는 듯 했다. 우리는 이미 무뇌증을 경험했기에 그러한 압력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당사자들이 임신 중 접하는 잘못된 정보도 피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세살 된 세실리아가 아기 사진을 봐도 되냐고 물었다. "사진을 못 받았어. 다음에 사진 달라고 꼭 부탁할게." "엄마, 조금 슬퍼?" "응. 아기가 약간 아프대. 머리가 아프대." 세실리아는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아기가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세실리아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이후 몇 주간의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양가 식구들 모두 커다란 슬픔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큰 버팀목이었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가령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거나 아이들을 대신 돌보아주었다. 또는 그저 우리를 위해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모든 경험담을 읽었다. 무뇌증 아기를 출산한 가족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의 경험담은 슬펐지만, 동시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기들의 삶이 비록 짧긴 했지만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의 짦은 생을 간직하기 위한 다양하고 멋진 방법들을 발견했다. 경험담을 읽어나가며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그건 건강한 눈물, 귀중한 눈물이었다. 나는 울어야만 했다. 내 아기가 곧 죽게 될거란 소식을 듣지 않았는가!

우리는 첫번째 초음파 검사 때 아기 성별을 전달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찾았다. 두번째 초음파 검사는 비디오 카세트에 녹화되었다. 우리의 아기이름수첩을 뒤적이며 적합한 이름을 찾았다. 우리 마음에 들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름이어야 했다. 초음파사가 남자아이라고 했을 때 나는 '베네딕트(은혜) 올리버(평화)'가 내 뱃 속에 있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무뇌증 진단을 받았을 때, 앞으로 남은 4달 반이라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앞으로 모든 일을 어떻게 감당해낼지 막막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계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4달 반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매달 클리닉을 찾아가 조산사들과 만났다. 조산사 매기는 우리에게 찾아온 첫번째 축복이였다. 매기는 아기의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는 데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원한다면 매주 병원에 와서 베네딕트의 심장박동을 들어봐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우리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우리의 요구에 최대한 맞추겠다고, 우리를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사자 부모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각종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훗날 최대한 많은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들을 리스트로 작성했다.

"우리 부부는 아들 베네딕트 올리버를 통해 축복을 받았어요. 베네딕트는 2001년 7월 17일 태어날 예정이에요. 세실리아와 세바스챤의 소중한 남동생이지요. 베네딕트는 무뇌증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거예요. 부디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무뇌증 진단을 받은 그 달에 이 편지문을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전송했다. 이를 통해 기도후원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베네딕트의 무뇌증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베네딕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았으면 했다. 마치 내가 임신한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주변에서 나를 대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한 자조그룹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 가입된 회원수는 100명이 넘었는데, 대부분은 무뇌증 아기를 잃은 적 있는 엄마들이고 일부 아빠들도 있었다. 임신 중에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당시 내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이 바로 이 자조그룹이 아니였나 싶다. 우리와 똑같은 일을 겪은 다양한 사람들을 온라인상에서 정규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다양한 정보 뿐만 아니라 따뜻한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임신이 진행되면서 잦은 출혈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나는 전치태반 4등급의 상태였다. 그래서 병원에 며칠 입원하는 일이 잦았다. 임신 28주와 36주 사이에는 무려 7번이나 병원에 갔다. 그것도 결국은 축복이었다. 이를 통해 병원 관계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원에서 더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었고, 병원 관계자들도 내게 친숙해졌다.

병원에서 베네딕트는 초음파 장치와 숨바꼭질을 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초음파 검진을 할 때마다 몇 번 발길질을 한 후 화면에서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다. 조산사 매기는 아이가 "뒷방"에 몸을 숨긴다는 표현을 썼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보면 여러모로 유익했다. 나는 하루에 3번 베네딕트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와중에 발길질도 느낄 수 있었다. 태반이 자궁구를 완전히 덮었기 때문에 임신 37주에 재왕절개가 불가피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재왕절개를 받고 싶었기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어느 통계자료에 따르면 자연분만을 통해 태어난 무뇌증 아기들의 생존률은 겨우 50퍼센트라고 한다. 베네딕트가 죽은 채 태어나도록 그 모든 출산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작별인사가 아니라 환영인사를 먼저 해주고 싶었다.

Benedict, baby in Anencephalie

베네딕트는 6월 25일 월요일 오후 1시 52분에 태어났다. 아이는 24시간 13분을 살고 오후 2시 0분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가 얼마나 예쁘던지, 어찌나 달콤한 향기가 나던지, 이 모든 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베네딕트는 병원에서 준 아주 작은 모자를 썼다. 모자가 너무 작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치 재단한 듯 아이에게 딱 맞았다. 아이의 얼굴은 첫째와 둘째가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생겼다. 아이는 정말 완벽했다. 몸무게가 2600g 밖에 안되었지만 제법 포동포동했고 키는 46cm였다. 태어날 때 그리고 이후 몇 번 울음을 터뜨렸다. 건강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그건 울음소리였다. 숨 쉴 때는 새근새근 거렸다.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었고 발에 간지러움을 탔다. 한번은 15분간 엄지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병원 관계자와 수술팀은 훌륭했다(많은 사람이 함께 눈물을 흘렸고 몇몇은 기도를 해주었고 베네딕트가 태어나는 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베네딕트가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무한한 행복에 겨웠다.

조산사들도 매우 친절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우리 세 사람만 있도록 해주었고, 이따금씩 상황체크를 위해서만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들은 우리를 극진히 보살폈다. 베네딕트가 젖을 빨 수 없자 초유를 짜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모은 초유를 베네딕트에게 숟가락으로 먹여주였다. 이로써 베네딕트는 자신의 생에 통틀어 3번의 끼니를 먹었다. 아이가 반드시 배가 고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모유수유를 할 수 있어 감사했다. 베네딕트가 사망하고 그리고 모유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들이 이 모유를 마실 만큼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들이 초유를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었기에 이 또한 감사했다.

월요일 오후에 전문사진사 한 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부른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보니 이 클리닉에서는 사생아가 태어나거나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 사진사가 와서 무료로 사진을 찍어준다는 것이다. 어느 시간대든 상관없이 말이다. 정말 감사했다. 사진사는 베네딕트의 손과 발이 담긴 아름다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고 아기를 품고 있는 나와 남편의 모습도 찍어 주었다. 베네딕트가 사망한 후 이 사진들이 있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베네딕트의 손도장과 발도장을 찍기 위해 찾아온 여인도 있었다. 아이의 손톱과 손금,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준 그녀가 참 고맙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베네딕트를 찾아왔다. 세실리아와 세바스챤, 친가와 외가쪽 조부모, 14명의 삼촌과 고모들, 24명의 조카들 중 21명, 베네딕트의 대모, 그리고 신부님인 우리 친구. 그의 조카 중 한 명은 심지어 비누방울을 병원에 가지고 와서 베네딕트를 위해 비누방울을 불어주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우리는 셋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있는 일분 일초도 허비하기 싫었다. 나는 아들이 제발 수요일까지만 버티기를, 제발 17시간 반(토마스가 살았던 시간)만 견뎌내기를 기도했다. 나는 아이가 그래도 하루는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너무 지친 나머지,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교대로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거나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아이를 말 없이 안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사랑했다.

간호사들은 베네딕트의 몸 상태가 약해짐에 따라 아이의 피부색이 변할 거라 했다. 아이는 화요일 아침에 무호흡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의 피부는 여전히 정상이었다. 아이가 죽었을 때(피부색이 변하지 않은채)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베네딕트가 더 오래 생존할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우리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긴, 24시간 이상을 살았다. 베네딕트와 함께 한 시간이 참으로 감사했다.

아이가 죽은 후 우리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혔다. 훗날 아이의 몸을 잘 기억하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를 많이 남겼다. 수요일 오후에 장례사가 아이를 데리고 갈 때까지 우리는 아이와 함께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함께 애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는 목요일 아침 집으로 갔고, 장례식을 위해 만들고자 했던 책자를 완성하면서 저녁을 보냈다. 책자를 만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과물에 만족했다. 바깥면에는 베네딕트 얼굴 사진이, 안쪽에는 그의 한쪽 발 사진이, 뒷면에는 시 한 편이 있었다. 텍스트는 이미 출산 전에 준비했었기에 이제 날짜만 채우면 완성이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일을 미리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오로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 베네딕트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우리 가족들과 친척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나는 세실리아와 세바스챤이 과연 이 모든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정말 잘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병원에서 베네딕트를 본 시간은 너무 짧았었고, 그때 베네딕트에게 집중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세바스챤이 최선을 다해 베네딕트 몸무게 재며,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 (베베, 베베, 베베)” 하며 열창하는 모습을 비디오 촬영했다. 세실리아는 남동생을 위해 아침에 노래를 불렀고, 베네딕트가 그의 테디베어를 전부 곁에 두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제 세실리아는 이 곰인형들을 자신이 직접 보살피고 있다.

Benedict, baby in Anencephalie

이날 밤 베네딕트는 우리 곁에 마련된 아기침대에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을 위해 구입한 옷을 아이에게 입히고 아이를 담요에 싸서 관에 눕히는 과정은 참으로 가혹했다. 귀여운 아들 얼굴을 다시는 못보게 된다는 생각에, 차마 관 뚜껑을 닫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이 사진이 많이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이의 관 속에 여러 물건을 함께 넣었다. 토끼 인형, 팬던트 반쪽(나머니 반쪽은 내가 걸고 다닌다), 장미화환, 세례 때 베네딕트 담요에 부착된 부적, 수호천사 핀, 대모가 쓴 편지, 세실리아가 그린 그림, 세실리아 그리고 세바스챤, 마크, 나의 머리카락 한 가닥 등. 나는 아이를 내가 직접 만든 담요에 정성스럽게 감쌌다. 우리 가족은 차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사실에 매우 슬펐다.

아이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장례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슬픔의 장소’이다. 그러나 우리의 애도는 이미 4달 전에 시작했다. 그래서 아이의 장례식은 예상만큼 강하게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물론 슬펐다. 그러나 그것은 격한 슬픔이 아닌 잔잔한 슬픔이었다. 베네딕트는 토마스 옆에 묻혔다. 묘지는 우리가 사는 동네에 위치해 있다. 공동묘지에 찾아가 아들의 작은 묘를 바라보는 일은 너무 슬프다. 하지만 베네딕트가 그의 사촌형 바로 옆에 묻혀 있어 정말 다행이기도 하다.

아들이 무뇌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보고 '정말 귀엽다', '완벽하다'라고 표현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 귀여웠고 정말 완벽했다. 귀여운 아기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아들이었다! 나는 세실리아와 세바스챤이 건강하다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로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베네딕트가 너무 그립다. 그러나 아이의 짧았던 생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체험이자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었다. 베네딕트는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의 모든 생을 보냈다. 과연 이보다 더 나은 삶이 또 있을까?

Theresa Streckfuss, Australia 테레사 스트렉푸스

 

마지막 업데이트: 202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