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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눅

 

아녹 무뇌증 아기

2000년 7월 18일 ~ 2000년 7월 19일

2000년 7월 18일 우리 넷째 아녹이 태어났다. 그리고 13시간 후, 아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부터 우리가 아눅과 함께 했던 시간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임신 20주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리고 본격적인 초음파 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자궁에 이상이 관찰된다며, 이는 분만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100프로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내가 CHUV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대학병원)에 가서 좀 더 정확한 검진을 받아보도록 권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정상이라고 했다. 아기 머리가 너무 밑에 자리잡은 탓에 머리만은 검사할 수 없었는데, CHUV에 가면 이 또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2주 후 가벼운 마음으로 초음파전문의인 비알 박사를 찾아갔다. 산부인과 주치의가 의심했던 자궁이상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검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비알 박사는 아기 머리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우선 나보고 옷을 다시 챙겨 입으라며, 그 후 모든 걸 설명하겠다고 했다. "아기가 매우 심각한 기형이 있습니다. 무뇌증이에요. 머리뼈와 두피가 없는 기형이지요. 이로 인해 뇌가 양수에 노출되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립니다. 현재 뇌 대신에 조직 덩어리만 남아 있어요. 이러한 상태에서 태아는 살아 남을 가능성이 희박하고, 출생 후 바로 사망에 이르지요." 박사는 자신의 진단결과가 확실하며,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럼 이제는?"

내가 원한다면 임신 중절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니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순간 이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고, 내게 한 가지 만은 분명했다. 생사의 결정권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언제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다. 단호한 내 대답에 의사는 "어떠한 선택이든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라며 남아있는 임신기간과 출산은 앞으로 정상적으로 진행되겠지만, 양수과다증이 유일한 위험요소일 수는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양수를 확인하고 조절하는 일은 아주 쉽다고 했다. 의사는 더 궁금한 점이 있는지 물었다. 도대체 내 주변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된 질문거리를 끄집어낼 수 있겠는가?

비알 박사는 자신에게 언제든지 연락해도 된다며, 내가 원한다면 자신의 병원에서 계속 검진을 받아도 된다는 제안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야 나는 크리스토프의 품에 안겨 목 놓아 한없이 울었다. 남편은 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먼저 안심했다. 나와 반대로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남편 또한 이 '욥의 고난'에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내가 임신을 끝까지 유지하리란 걸 분명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왜요?"라고 묻지 않기로 다짐했다. 어차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순 없을 테니까. 첫째 딸 아나이스는 내게 무슨 이상이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그래서 나는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거라고 세 명의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우리 기도하자. 예수님이 치유해 주실꺼야." 우리가 아이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날 저녁, 병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 의사인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삼촌은 무뇌증 아기는 생존할 가망성이 없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의학적 정보를 전해주지 못했다. 그 대신, 뱃속 아기에게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앞으로 되도이면 평범하게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이 말에 내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무뇌증 진단을 받은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죽음을 선고받은 존재를 품에 안고 앞으로 남은 4개월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은 아마 내 삶에 있어 최악의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이라곤 단 한 숨도 잘 수 없었고, 머릿 속은 수백가지 잡념들로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침 완전 녹초가 되어 가까스로 일어나 아나이스(6.5살)와 막스(5살), 타베아(3살)를 겨우 챙겨줄 수 있을 정도였다.

목사님 내외가 우리집을 방문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해 주시며 아기를 축복해 주시도록 함께 기도했다. 하지만 아기를 온전히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진 않았다. 그런 기도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산파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녀도 내가 되도록이면 계속 평범하게 지내라며, 건강한 아기를 대하듯 뱃속의 아기에게 모든 걸 주라고 격려했다. 내 아기는 다른 아기들처럼 똑같이 사랑받고 똑같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출산 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산파는 무뇌증 관련 홈페이지 주소를 하나 주었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무뇌증 아기들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실린 각종 경험담을 읽으며 큰 위안을 얻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낳는 것은 결코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 세상이 우리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만은 이해해 주실 테니까. 바로 이 점을 하나님은 성경구절을 통해 거의 매일 보여주셨다. 성경구절들은 실제로 내 마음을 감동시켰고, 큰 도움과 용기를 선사해주었다. 그때 우연히 다음 구절을 읽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6: 53-57)

바로 이 구절 속에 힘과 희망이 들어있었다! 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내 앞에 놓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견디게 한 건, 기적을 간절히 원하는 희망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이 아기가 부활해 영생을 누린다는 깨달음이었다. 감히 80년(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이란 인생이 영원 앞에서 그 무엇이란 말인가? 영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제 아기이름을 짓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후회없이 보내고자, 우리는 아기의 성별이 알고 싶었다. 딸이었다! 우리는 딸아이를 ‘아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날 병원에서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산부인과 주치의는 내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피력하고 있었다. 아눅을 낳으려는 우리 선택에 전혀 수긍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거라는 말까지 내뱉었다. 그날이 그 산부인과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앞으로 남아있는 검진은 비알 박사에게 받았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신뢰가 가는 분이었다.

아눅이란 이름을 택한 이유는, 사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이름 자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이렇다. '아눅(Anouk)'은 은혜를 뜻하는 '안네(Anne)'의 변형이다. 은혜란 사실 우리가 받을만한 가치가 없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받는 것이다. 첫째 딸 이름인 아나이스(Anaïs) 역시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아나이스는 두 차례의 유산 끝에 얻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선물을? 그렇다, 다른 의미에서의 선물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척 귀중하고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화였다. 현실의 모든 것이 우리를 저항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아눅 앞에 놓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그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눅을 치유하실 능력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눅을 실제로 치유하실 거라 믿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하나님이 비슷한 경우에 행하신 치유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한치도 의심스럽진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바울이 자신의 병이 치유되길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제 내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이제 남아있는 임신기간을 전적으로 즐기고 싶었다. 뱃속에서 딸은 많이 움직이는 편이었는데,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루는 딸의 움직임을 종일 느끼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딸의 인생 하루하루가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금 딸이 죽은 건 아닐까?'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후 태동을 다시 느꼈을 때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한 부모들을 찾고자 온갖 문이란 문은 다 두드려보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무뇌증은 상당히 희귀한 병이다. 둘째, 무뇌증 진단 직후 여성들은 거의 모두 낙태를 결심한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어느 기독교 가족잡지에 공고문을 실었는데, 결과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공고문이 발행된 후, 세 가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무뇌증 아기를 출산한 적이 있는 가족들이었다.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그들의 경험담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게다가 나는 '임마누엘, 무뇌증 아기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Immanuel, die Geschichte der Geburt eines anenzephalen Kindes)' 란 책을 소개받았다. 이 책에서 신학자 마르쿠스 란(Markus Rahn)이 인간존엄과 관련하여 서술한 부분은, 내가 늘 마음에 품고 느끼던 점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인간은 신체크기와 인지능력, 수행능력, 연령 등의 측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러면서도 직립보행과 도구사용, 언어 등 전형적으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면은 몇몇 동물도 갖고 있다. 다 자란 동물은 신생아와 유소아를 훨씬 능가하는 몇 가지 측면도 있다. 그러나 신생아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코 성인보다 못한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다움이란 세월에 따라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나 정신지체장애인도 건강한 사람에 비해 결코 인감다움이 덜 한 사람이 아니다. 노인도 소아에 비해 인간다움이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인간다움이란 불변적이다. 전 생애를 거쳐 변함없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과연 언제 시작하는가? 태어나면서? 출생은 인간의 삶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태어나면서 인간 본질이 변하는 게 아니라 환경이 바뀌게 된다. 따라서 가능한 답은 하나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이다>. 인간다움은 출생 후에도 불변하기 때문에, 출생 전에도 그래야 한다. 인간다움은 출생 후 개개인의 특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출생 전에도 그래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장한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부터 인생이 끝날 때까지 사람은 성장한다."

우리는 비알 박사를 통해 병원 내 신생아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딸을 출산하고 그 이후에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몇 가지 사항을 이야기 했고, 우리의 희망사항은 곧바로 수용되었다. 전문의와 대화하며 나는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눅이 출생하기까지 불과 몇 주 밖에 남지 않았음을, 그때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한 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뇌증 아기는 대부분 자연분만하기 어렵다. 뇌가 없어 호르몬이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알 박사는 임신 38주에 출산여부를 결정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시기에는 아눅의 신체가 완전히 형성되었고 앞으로 체중만 증가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임신기간이 2주 줄어든다는 생각에 웬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버티고 싶은 바람이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적절한 시기에 모든 걸 이끌어 주시길 바랬다. 아눅과 나, 크리스토프, 세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게 원만히 진행되길 바랬다. 그러면 아눅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멋지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날 두렵게 했다. '벌어진 머리상처를 보고 어떻게 해야할까? 아눅이 우유를 마실 수는 있을까?'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이사야 8:13-14)

이 구절을 읽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든 안전한 하나님 곁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 나는 이 성경구절이 담긴 찬송가를 들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언약을 늘 상기시키고 내가 아눅을 하나님의 눈으로, 즉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 준 말씀이었다.

분만일을 앞두고 며칠 간 매우 괴로웠다. 하루가 1주일처럼 느껴졌고, 도무지 출산 외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홀로 외딴 섬에 있었으면 했다. 주변에서 꽤 많은 분들이 나를 귀찮게 했다. 물론 내 상태가 어떤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랑스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내 마음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하루에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고, 미친 듯이 기뻤다가 죽을만큼 슬퍼졌다. 신체적으로는 건강했다. 출산 전 배당김이나 압력 같은 증상도 없었으니 말이다. 신체는 평화로웠다. 반면 정신은 심각하게 혼란스러웠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보니 미래가 두려웠다. 사실 분만 자체도 만만치 않은데다, "출산 이후"가 워낙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한 순간,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어떻게 느꼈을지 이해가 갔다. 좌절 그리고 두려움. 하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대신 그 고통 속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분만 예정일 하루 전, 비알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분만유도를 부탁했다. 지난 달까지만 하더라도 자연분만이 가능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 다음 날인 7월 18일, 병실에 도착하니 달력 속 다음 성경구절이 우리를 맞이했다.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전도서 8:12)

얼마나 대단한 언약인가! 내 마음 속 두려움은 싹 물러났고, 다시는 떠나지 않을 평화가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다. 분만은 아주 짧은 시간 내 지극히 정상적이고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아눅은 오후 5시 21분 세상의 빛을 보았다. 산파가 아눅에게 조그마한 모자를 씌워주고 난 후 나는 드디어 딸을 품에 안았다.

아눅은 살아 있었다!

아눅은 숨쉬기 시작할까?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이 고요히 멈춘 듯 했다.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내 딸이었다. 딸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이 귀중했고 감사했다. 아눅이 곧 죽을 거란 걸 알지만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방은 기쁨과 환희로 충만했다. 기쁨 그리고 평화였다. 아눅은 주저하듯 수줍게 숨쉬기 시작하더니 얼마후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나는 아눅을 더 가까이 바라보았다. 조그맣고 앙증맞았다. 특히 머리가 매우 작았다. 내가 각별히 신경써서 최대한 작게 뜨개질 한 모자도 아눅에게 너무 클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장 모자 속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대신 딸의 나머지 부분을 질리도록 바라보며 하나하나 눈 속에 담았다. 나는 내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심한 기형을 가진 아기가 아닌, 바로 내 딸이었다. 아눅은 앞서 태어난 세 명의 아이들과 어쩜 그렇게도 똑같이 생겼는지 모른다.

아나이스와 막스, 타베아도 막내동생을 만나고자 분만실에 들어왔다. 각종 기계들로 가득 찬 방을 보고 다소 위축된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꿈쩍도 못하는 엄마를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막내동생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아무도 아눅을 한번 안아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기의 자줏빛 피부가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훗날 아이들이 동생을 잘 기억하도록 우리는 수십장의 사진을 남겼다.

"이토록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가족이 있다니...따님은 정말 행운아예요." 산파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분만과정에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소아과 의사도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에 대해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토록 완벽하게 모든 걸 이끌어 주신 것이다!

부모님이 다녀가신 후, 나와 아눅은 단둘이 남겨졌다. 딸은 듣지 못했다. 파란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다. 출생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빠는 반사’도 없었다. 그래서 아눅에게 젖을 먹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우리가 보여준 사랑에 분명하게 반응했다. 사랑은 가슴으로 서로 주고 받는 일이기에, 뇌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어느새 피로 젖은 모자 속을 바라 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머리상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 또한 딸의 일부분이기에 충격을 주진 않았다. 병실 내부는 정말 평화로웠다. 아눅을 품에 안을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딸이 살아있어 너무 기뻤다. 하지만 아눅은 더 이상 생존할 가망성이 없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새벽 2시경 아눅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호흡이 멎었다. 나는 소아과 의사를 호출했다. 석션을 하고 나니 아이 상태가 다시 진정했다. 하지만 아눅은 전보다 더 힘들게, 더 느리게 호흡했다. 아침 6시 반 즈음 나는 크리스토프와 함께 아눅을 위해 기도하며, 딸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넘겨주었다. 딸은 마지막으로 숨을 한번 내쉬더니 영영 숨을 거두었다.

아눅은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아이가 더이상 생존하지 않는다는 걸 굳이 의학적으로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내 품에는 빈 껍질만이 누워 있었다. 나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슬픔에 겨워서가 아니었다. 물론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아눅의 영혼이 이제 하나님 곁에 있다고 확신하니 마음이 놓이면서 기뻐 눈물이 나왔다. 크리스토프도 함께 울었다. 남편의 눈물이 내게 위안이 되었다.

아눅을 씻기고 옷 입히기 전, 우리는 아이의 손도장과 발도장을 남겼다. 딸을 향한 추억을 최대한 많이 남기고 싶은 바람이었다. 훗날 추억을 버리는 건 가능하겠지만 추억을 보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병원에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다. 집에서는 세 아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했다. 아눅을 위해 우리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었다. 병원을 떠나면서도 울고 차 안에서도 펑펑 눈물을 쏟았다. 티베아가 아눅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때도 눈물이 터졌다. 크리넥스 한 통을 안고서 남은 하루를 보냈다. 오로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했다. 그 어떤 쓰라림도, 비탄도 없었다. 내가 겪은 일 중 단 일 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슬프면서도 기뻤다. 왜냐하면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제야 나는 임신 때 누군가가 해 준 말이 이해된다."사랑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박탈하는 게 문제다." 우리는 아녹에게 우리가 가진 모든 사랑을 주었고, 이제 그 사랑을 놓아줄 수 있다.

모니카 재퀴어, 스위스
Monika Jaquier, Switzerland
이메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가능)

 

 

마지막 업데이트: 2019.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