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 Go to main menu; Go to languages.
 Menu

브랜든 마이클

 

브랜든 마이클, 무뇌증 아기

2002년 1월 15일 ~ 2002년 1월 17일

내 이름은 제이미, 남편은 트레버이다. 우리는 세 명의 자식 중 두 명을 키우고 있다. 첫째 타일러는 6살, 둘째 케이라는 2살이다.

당분간 셋째는 가지지 않기로 계획했지만, 전혀 예상치도 않게 2001년 5월에 아이가 들어섰다. 이제 막 케이라가 첫 돌을 맞이한 터라 나는 셋째 임신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기의 첫 태동을 느꼈을 때, 모든 걱정과 근심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우리 가족은 앞으로 새로운 식구가 될 아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첫째와 둘째를 가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덧과 약간의 체중 증가가 있는 등 임신기간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웬지 뱃속의 아이가 남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동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첫째 타일러를 임신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병원에서 받은 모든 검진은 그야말로 하나의 절차에 불과했고, 우리 부부는 병원에서 아기의 힘찬 심장박동을 들으며 행복에 겨웠다. 그 무렵 우리는 아기방을 꾸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앙증맞은 아기용품을 하나둘씩 구입하기 시작했다. 출산예정일은 1월 20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2001년 11월 19일 월요일은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우리 부부는 무척 들떠 있었다. 임신 31주에 실시되는 초음파 검진을 통해 아기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우리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계획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곧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나는 초음파 검진을 받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검사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초음파사는 검진 내내 무척 과묵했고 그다지 우리와 대화하고 싶은 표정이 아니였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들뜬 상태로 수다 떨며 아기가 공주님일지 왕자님일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초음파사가 아기에게 이상을 발견했음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초음파사는 내가 질문을 하기라도 하면 그저 나에게 좀 조용히 해달라며, 옆으로 누워달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 점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첫째와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옆으로 누워 검사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임신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 정확한 영상을 잡아내기 위해 초음파사가 유독 집중해야 하나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초음파실에 머물러야 했다. 어쩌면 초음파사가 기타 필요한 정규검사도 함께 실시하고 있나보다 생각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초음파사가 방에 들어오더니 특이한 질문을 던졌다. "17개월 전에 이 병원에서 딸을 순산하셨지요?" "아이는 건강했나요?" 나는 모든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초음파사는 다시 방을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싶어 나는 남편에게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몇몇 사람이 모여 초음파 사진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고 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 없었다. 남편은 흥분한 나를 진정시키려고 온갖 애를 썼다. 나는 초음파사가 곧 무슨 말을 할 지 느낌이 왔다, 우리 아기에게 무슨 이상이 있다고 말이다. 이 순간 주치의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트레버를 바라보았다. 주치의의 눈빛 또한 불안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아기에게 팔이나 다리가 없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아기가 무뇌증 같은 병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앞에 자리를 잡은 의사는 지금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이에게 신경관 결손이 있다고 했다. 신경관은 일반적으로 임신 3주와 4주 사이에 닫히는 게 정상인데, 우리 아기의 경우 그렇지 못한 탓에 두뇌와 두개골, 두피의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살 가망성이 없습니다" 뿐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덮석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화장실에 겨우 들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 일을, 나는 오늘날까지도 절실히 후회한다.

의사는 유도분만을 하는 방이 위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집에 가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결정을 내리라는 그 어떠한 제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를 무작정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내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주치의는 잘 알고 있다, 환자가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할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환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암튼 나는 의사를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몇 시간 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머리 속에는 온갖 질문이 정신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이도 병원의 간호팀은 친절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로하며 가능한 한 모든 질문에 답해주려고 애쎴다.

유도분만을 위해 3일간 병원에 입원해 수차례 초음파 검진도 받고 약물도 복용했지만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리 속이 분명해지면서 유도분만을 멈추고 싶다는 바람이 커져만 갔다.

나는 뱃속의 아들이 아직 태어날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초음파 사진에서도 아이는 여전히 가로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직 태어날 때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했다.

결국 우리는 임신을 유지하기로 결심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기방에 발을 들여놓는 게, 이미 구입한 아기용품들을 쳐다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며 궁리한 계획들, 우리 꿈들은 전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 듯 했다. 아들을 곧 잃을 것이라는 쓰라린 현실을, 이제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는 남아있는 9개월을 최대한 평범하게 보내고자 했다. 마침 그때는 크리스마스 기간이었는데 이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매우 특별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남기를 바랬다.

시간이 갈수록 내 배는 크게 부풀었다. 원래 나는 임신 후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셋째 임신만큼은 달랐다. 브랜든이 뱃속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의 생명이 나한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뇌증에 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다.

무뇌증 아기들은 대부분 사산하거나 출생 후 몇 시간 또는 며칠만 생존할 수 있다. 일부 의사들은 무뇌증 아기들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브랜든은 그 반대였다.

1월 12일에 진통이 시작했다. 비교적 약했지만 규칙적인 진통이었다. 매우 길고 험난한 진통 끝에 아이는 분만예정일 보다 5일 전인 2002년 1월 15일에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몸무게는 2170 g, 키는 44.5 cm 였다. 분만 중 양막이 아이의 머리를 덮고 있었는데, 그랬기에 아들이 살아서 태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들을 처음으로 바라본 순간은 감격 그 자체였다. 비록 아이는 무뇌증을 앓고 있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이뻤다. 누가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가족을 쏘옥 빼닮은 아이였다. 남편의 얇은 입술, 귀여운 볼, 턱, 그리고 코를 물려 받은 앙증맞은 아들이었다. 비정상으로 형성된 동공 때문에 두 눈은 약간 돌출되어 있었고, 첫째와 둘째 같이 진한 갈색 눈을 가졌다.

브랜든은 화요일 자정 12시 32분에 태어났다. 아주 강렬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친지나 친구들의 방문을 일체 거부했다. 오로지 우리 세 사람만이 함께 하는 가운데, 아들이 곁에 있는 동안 집중적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분만 약 한 시간 후 우리는 목사님 한 분을 모셔와 아들에게 '브랜든 마이클 보보라'란 이름으로 세례를 선사했다.

아기를 출산하는 일은 육체적으로 굉장히 고된 과정이다. 하물며 죽어가는 아기를 출산해야 할 때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리란 정말 불가능할 만큼 힘들다.

브랜든이 우리 곁에 오래 있지 못할 걸 알았기에, 나는 몹시 지쳤지만 그래도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은 내가 깨어있을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우리는 새벽 내내 아들을 안고 있다가 트레버는 침대 옆에 마련된 접이식 의자에 잠깐 잠이 들었고, 희마한 불빛 속에서 나는 브랜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남편이 잠자는 동안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너무도 앙증맞고 잘생긴 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아이의 모자 속을 한번 바라볼까 시도를 했지만 아이의 이마를 쳐다본 순간 그 용기가 사라졌다. 이 점이 지금까지도 후회된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빠를 쏙 빼닮은 형상을 방해할지도 모를 그 기형을 차마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1월 15일, 우리는 건강한 아기를 출산한 보통 가족들처럼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는 처음으로 아이 목욕도 시켰는데 브랜든은 목욕이 너무 싫은 지 연신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나는 아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사랑스럽게 말을 건네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는 나즈막하게 소리도 냈다. 아이 손톱을 자르다가 실수로 손에 상처를 냈을 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브랜든을 품에 안고 있다가 꾸벅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내가 아이를 깨운 바람에 칭얼대는 모습 마저도 귀여웠다. 무뇌증 아기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란 의사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이 아기들은 아픔과 기쁨, 무엇보다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이날 저녁에 첫째와 둘째가 브렌든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타일러에게 막내 동생은 우리와 함께 집에 갈 수 없다고 설명하는데,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타일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타일러는 동생을 즐겨 안았다. 동생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나를 도와 브랜든을 함께 보살펴 주었다. 카일라는 다소 달랐다. 19개월 짜리 카일라는 스스로가 아직은 아기였기 때문이다. 카일라는 질투를 하며 동생을 만져보거나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거나, 브랜든에게 자신이 먹던 비스켓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가족 전체가 담긴 사진과 비디오를 촬영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이 함께 보낸, 참으로 귀중하고 멋진 시간이었다.

1월 16일 새벽 내내 브랜든의 체온이 요동치자 우리는 두려웠다. 다행히 의료팀은 매우 친절했으며 우리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브랜든은 무호흡 증상은 없었으나 자주 토했다. 이날 밤 우리 부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2002년 1월 16일

나는 이 날을 "우리만의 하루"라고 부르고 싶다. 브랜든과 단둘이서만 보낸 하루이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에 남편은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귀가했고 그후 병원과 집을 계속 왕복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우리의 개인공간을 늘 존중해주었는데, 이점이 그들에게 참 감사하다.

따뜻하게 데운 로션으로 브랜든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아침을 보냈다. 아이는 마사지가 좋은지 투정 한번 없이 그저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아이를 마사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날은 우리에게 정말 멋진 하루였다. 물론 슬픈 순간들도 있었지만, 브랜든이 행동 하나하나에 그저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소중하고 가치있는 이 시간만을 기억하고 싶었다.

저녁 내내 브랜든의 상태가 양호했기에 나는 조금이나마 잠을 청하고 싶었다. 밤 10시 경 불을 끄며 브랜든에게 속삭였다. 내가 자는 동안 우리를 떠나도 괜찮다고,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놀랍게도 아이와 나는 새벽 3시까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2002년 1월 17일

브랜든의 소리에 나는 잠이 깼다. 아이는 울며 토하고 있었다. 얼른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아이를 진찰하더니 브랜든이 곧 죽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담당 간호사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던 남편을 다시 불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서로를 꼬옥 껴안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지막 사진을 몇 장을 찍고난 후 무거운 마음으로 아들과 작별을 해야만 했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아이는 가끔씩 나작하게 울면서 침을 흘렸다.

그렇게 우리는 아들이 세 시간동안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하나님은 브랜들을 다시 자신의 품으로 데려가셨다. 브래든은 아침 6시경 아빠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아들과 함께 한 기적 같은 53시간을 선물로 받았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선물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임신중절이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시고, 대신에 브랜든과 함께 할 소중한 시간을 선사해 주셨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 나의 신앙은 매우 깊고 견고해졌다.

우리가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태껏 상상도 못했던 힘이 내면에서 솟구쳤다. 그건 바로, 아침에 눈을 떠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용기였다. 무뇌증 자조모임에도 가입해 참석했다. 여기에서 응원과 의로를 받았고 그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짧았지만 기쁨으로 충만했던 브랜든의 삶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였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이 글을 적어나가며 나는 내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다.

제이미 보볼라

 

 

마지막 업데이트: 2019.04.17